본문 바로가기
BOOKS

밤의 유서 by 요슈타인 가아더

by 야매박사 2025. 6. 17.
반응형

노르웨이의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설 '밤의 유서'를 읽었다. 

(삶의 죽음,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에게) 

 

최근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을 우연히 읽고 북유럽 작가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북유럽 특유의 감정 과잉 없는 담담한 표현과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한 사람의 상황을 간접 경험할 수 있게 해 준 책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한 남자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그날 아내와의 추억이 있는 오두막 집에서 유서를 쓰며 밤을 보내고 그 이튿날 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태어났기에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자명하지만 그게 언제일지 어떻게 올지 알 수 없는 채 살고 있다. 

또한 그저 먼 이야기라 치부하고 죽음에 대해 깊게 고찰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거 같다. 

작가는 그런 우리에게 한 번쯤 죽음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주고 있다. 

 

소설의 배경인 노르웨

 

인상 깊었던 내용을 복귀해본다. 

주인공의 아들 크리스티앙과의 대화 

"다른 행성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요?" 

열 두살짜리 소년이 나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른다고 답했다. 

그런 나를 보며 크리스티앙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티앙, 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생각해 보렴. 저 우주에 가지각색의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말이야."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와"라고 소리쳤다. 

"크리스티앙, 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상상해 보자. 만약 이토록 넓은 우주에서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지구뿐이면 어떨까?그러면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되겠지. 적어도 지능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 말이야..." 

크리스티앙은 다시 나를 보며 "우와"라고 소리쳤다. 

 

 

아내 에이린과의 결혼에 관한 회상 

70년대 초의 사회적 분위기에 따르면 에이린과 나는 그다지 적절치 못한 행위를 했고 그래서 약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때 맞췄던 약혼 반지이쟈 결혼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금은 수억년 전에 있었던 초신성 폭발의 결과로 생긴 물질이다. 우리의 반지는 거대한 별이 폭발하고 소멸한 다음 생겨난 잔류물 인 것이다. 우리는 그 옛날, 별이 파괴되며 남은 것으로 서로에게 속한다는 약속을 했다. 

우리가 우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꽤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우리 또한 초신성 폭발로 인해 생성된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이니까. 그렇다. 우리는 우주의 티끌, 우주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우주의 티끌이라고 칭하기보다 우주의 불꽃 또는 섬광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우리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아내 에이린이 보낸 농부 덕분에 삶을 살게 된 주인공 알버트의 마지막 글 

세상과 작별하기까지는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다. 몇 달이나 작별을 준비하는 것은 길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저 그 시간이 더 길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

불치병을 안고 오래도록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겠지. 

그 시간 동안 가족들에게 큰 짐이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멋지고 훌륭한 세상과, 사랑하는 가족과, 고즈넉한 오두막과 작별하기까지 불과 몇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또한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오직 내게 남은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기만을 바란다. 어쩌면 그 시간은 딱 적당할지도 모른다. 

 

작가의 글 

죽음과 사랑 사이, 그 기묘한 얽힘에 대한 성찰, 왜 알버트는 자살을 포기했을까? 

 

나에게 죽음은 세 가지로 다가온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리고 "그(그녀)"의 죽음 

세 가지 죽음 중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1인칭, 2인칭,3인칭이 가진 인문학적 의미를 먼저 음마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2인칭과 3인칭의 구분이다. "너"라고 불리는 존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반면 '그,그녀,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나와 무관한 사람,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은 함께 있고 싶은 감정이나 욕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기쁘고,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우리를 슬픔에 빠지게 하거나 심하게는 고통까지도 안겨준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곧 사랑이 싹터야 '너' 혹은 2인칭의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이제 1인칭의 죽음, 2인칭의 죽음, 3인칭의 죽음 중 어느 것이 가장 쓰리고 아픈 죽음인지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다. 

바로 '너'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2인칭의 죽임이다. 함께 있으면 기쁘고 그렇지 못하면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너'다. 잠깐의 부재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데, 죽음은 오죽할까? 함께 있고 싶어도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게 죽음이다. 

2인칭의 죽음만큼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없다. 

 

아이러니하게 나의 죽음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려면 나는 살아있어야만 가능하다. 결국 내게 고통을 주는 것은 나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거나 먼 미래에 나의 죽음에 대한 염려, 걱정, 혹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알버트도 이렇게 말한 것이다. 

 

"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내 신체 기능이 하나둘 사라져 결국은 식물인간 상태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고 괴로울 뿐이다" 

 

나의 죽음, 그것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아서 아니 한 번만 경험할 수 밖에 없어서 무섭고 두렵다고, 나아가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상상될 뿐이다. 

 

힘내요 알버트. 언제 세상을 떠날지는 몰라도, 그 순간 당신은 딱 적당한 시간에 떠났다고 분명히 느낄 겁니다. by 옮김이 손화수 

 

알버트가 유서를 썼을 거 같은 호수가 보이는 오두막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유진 오닐> 저/<민승남> 역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반응형